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탑수스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원로원파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일부는 [[폼페이우스]]를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라비에누스]] 등은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귀속된 옛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그리고 마우레타니아로 나뉘어 있었다. 누미디아의 국왕 [[유바 1세]]는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원로원파를 지지하고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확인한 뒤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내전을 벌이느라 몇 달 동안 이집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원로원파는 그 틈을 타 북아프리카에서 기반을 다지고 대규모 병력을 육성했으며, [[우티카]]와 [[하드루메툼]]에 강력한 수비대를 두고 카이사르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이집트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쟁취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로 북상해 당시 소아시아의 절반을 점령하며 로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던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와 젤라에서 맞붙어 완승을 거두고 폰토스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내정을 정비한 뒤 북아프리카에서 활개를 치는 원로원파에게 관심을 돌렸다. 기원전 47년 12월, 카이사르는 로마를 떠나 12월 중순에 시칠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며칠 안에 6개 군단을 소집한 뒤 아프리카로 출항했다. 하지만 그의 함대는 출항 직후 악천후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카이사르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의 곁에 있는 병력은 보병 3천 명과 기병대 150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주둔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하하기로 결심하고 클루페이아와 네아폴리스를 지나 하드루메툼 근처에 상륙했다. 그는 하드루멘툼에 주둔한 2개 군단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하루 동안 하드루메툼 근처에 주둔하다가 루스피나로 남하했다. 이에 하드루메툼 수비대가 그를 추격했으나 카이사르의 역습으로 패퇴했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1월 1일 오후 늦게 새로운 기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흩어진 병력을 규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적의 예상되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루스피나의 요새를 강화하고 루스피나 시와 그의 진영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카이사르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로원파는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사령관으로 하여 8개 군단과 3천 명의 기병을 루스피나로 파견했다. 이에 앞서 라비에누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식량을 확보하러 원정간 카이사르를 요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카이사르의 노련한 대응으로 섬멸에 실패했다([[루스피나 전투]]). 여기에 누미디아의 국왕 유바 1세도 합류하기로 했지만, 이웃 국가인 마우레타니아의 국왕 [[보쿠스 2세]]와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군대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사로잡은 시민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어쩔 수 없이 30마리의 코끼리만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결국 스키피오는 원로원파 군대만을 이끌고 카이사르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라비에누스도 기병대를 이끌고 방어선의 빈틈을 노려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추가 병력이 루스피나 시에 꾸준히 도착하자,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철군한 뒤 누미디아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적군이 우티카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한 카이사르는 즉시 추격에 나섰다. 이후 양측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지만 전력이 완비될 때까지 회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이 무렵 부하에게 본국 수비를 맡긴 유바 1세가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 30마리의 코키리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했고, 카이사르 역시 제9 군단과 제10 군단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력에서 열세였던 카이사르는 우티카 공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으며, 스키피오는 그를 추격했다. 이후 제타 마을 주변에서 양군은 대치했으나,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는 걸 기피했다. 카이사르는 추가 병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스키피오에게 회전을 제의했으나 그가 끝까지 거절하자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고, 스키피오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46년 4월 6일, 양측은 탑수스 평원에서 격돌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